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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중세/근대 국가발전과 전쟁의 역사 요약: 독일

콜럼버스가 스페인의 후원을 받아 첫 번째 항해에 나설 즈음, 독일은 공국과 도시 등 400개가 넘는 자치영역으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독일은 명목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분 이었으나 실제로는 통제의 영역에 있었다 하기엔 통제를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독일은 중앙에서 정책을 시행하거나 세금을 거둘 정부가 없었으며 정규 군대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수사였던 마틴 루터는 1517년 가톨릭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 판매에 관한 비판을 담은 '95개조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당의 문에 붙였습니다. 이 방식은 당시의 대학에서 학문적으로 논쟁을 시작하는 방법이었으나 마틴 루터의 발표는 그 이상의 큰 파장을 불러왔습니다. 


루터의 논제에 독일어와 라틴어는 물론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독일을 포함한 유럽의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종교 개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은 가톨릭 교회가 반종교 개혁을 시작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신교와 구교의 갈등으로 촉발된 30년 전쟁은 독일에 크나큰 상처를 주었고 그 결과는 독일의 남부측은 대체로 가톨릭을 선택했고, 북부는 개신교를 선택하는 형태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16세기 들어 발트 해의 작은 공국 프로이센은 뛰어난 지도자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확장을 지속하기 시작합니다. 스웨덴의 침략을 17세기에 막아냈으며, 18세기에는 프레드리히 1세의 등장으로 번영기에 들었습니다. 프로이센 군대는 잘 조직된 보병, 엘리트 수류탄 투척병, 기병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프로이센은 남쪽으로 거대한 오스트리아 제국과 접하고 있었기에 나폴레옹이 등장하기까지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었지만 거의 대부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6세기에 독일은 베네수엘라를 식민지로 만드려고 많은 노력을 쏟았습니다. 많은 부를 가진 아우구스부르그 가문은 1526년에 식민지 설립 권리를 확보했고 1529년부터 전설로 알려진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를 찾아 탐험에 나섰습니다. 코로에 상륙한 200명 이상의 이주민들은 황금도시를 찾는 탐험을 계속하면서 아프리카 노예들을 이용하여 사탕수수 농장을 함께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1556년 이들이 건설한 식민지는 스페인령에 편입되었고, 대부분의 독일 식민지는 황금을 찾아 나서던 시기에 질병과 원주민들의 공격으로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독일 이야기는 여기 까지입니다. 세계사를 깊이 있게 알지 못하는 제게 독일의 최대 번영기는 2차 세계대전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주변 국가들에겐 인류의 재앙이라 불리기도 합니다만, 히틀러라는 비극의 인물이 나타나기 까지 오랜 세월 인내해온 국가 처럼 보여지는 느낌도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었던 장벽을 허물고 흡수합병하여 하나의 독일이 되면서 명목GDP 4위, PPP기준 GDP 5위라는 숫자는 정말 국민들 모두 선진문화를 갈망하고 도전하는 것이 습관적으로 몸에 베어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간혹 업무상 카메라 제품군을 검색할 때마다 독일의 제품들이 비싼 가격에 판매되는 것을 보면 정말 기술력이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카메라 얘기를 하니 또 뭔가 새로운 제품을 들이고 싶은 욕구가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