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혁명을 통해 프랑스의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리프는 중도적인 군주제를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이런 필리프의 정책을 못마땅히 여기는 국민들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경제 불황이 1840년 중반 이후로 이어지면서 노동자 계급운동도 치열해졌고, 선거권의 확대 요청도 많아졌습니다. 1848년 2월 파리에서 열리게 된 공개토론회가 갑작스러운 정치적 시위로 확대되면서 시위의 진압과정에 20여명의 사망자가 생겨났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을 피해 루이 필리프는 영국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프랑스 2월 혁명의 큰 원인은 루이 필리프의 반복된 실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왕위에 오른 초기에는 자유주의 정책을 장려하고 시행했으나, 대다수인 국민들과 소통하기보단 소수의 자본가들과 어울리며 점차 보수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뇌물을 주고 받으며 국가의 정책보다 자본가들을 위한 정책을 펼쳤던 것입니다. 게다가 동방문제와 여러 외교관계에서 실패를 거듭하며 프랑스의 위신을 떨어뜨렸습니다. 더욱이 생시몽, 루이 블랑 등의 사회주의 사상의 성장에 대해 언론과 출판계를 억압하면서 민심을 혼탁하게 했습니다. 왕의 연이은 실정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운 시기에, 티에르 등은 선거법 개정을 요구했고, 1848년 2월 파리에서 개혁을 위한 토론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토론회는 정치적인 시위로 발전했고 정부에서 이를 해산시키려 하다가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2월 혁명으로 이어졌고 시민들은 왕을 폐위한 후 공화주의자 중심의 정부를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신헌법에 의해 모든 성인남자가 참여할 수 있는 보통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이 선거를 통해 나폴레옹 1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2월 혁명의 소식이 유럽의 각국에 알려졌고, 오랫 동안 군주의 권력에 불만을 가졌던 각국의 시민들은 혁명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오스트리아 민중은 봉기를 통해 메테르니히를 영국으로 추방시켰고, 황제 페르디난트 1세가 조카 프란츠 요세프에게 왕위를 넘겨줌으로써 간신히 봉기를 가라앉혔습니다. 헝가리는 코슈트를 대표로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프로이센도 베를린 봉기를 통해 국왕 빌헬름 4세가 신헌법을 만들고 그에 따르게 했습니다. 2월 혁명의 결과 대통령으로 선출된 루이 나폴레옹은 임기 4년 이후의 제위를 탐내며 군대와 교황, 성직자들을 수중에 넣고 국내를 돌아다니며 민심을 샀고, 1851년 쿠데타를 통해 의회를 해산시켰습니다. 신헌법을 선포해 대통령의 임기를 10년으로 연장한 후, 국민투표의 결과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폴레옹 3세라 칭함으로써 프랑스 제2제정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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