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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도의 1차 독립전쟁

인도의 1차 독립전쟁은 1857년 독립전쟁, 인도대항쟁, 인도항쟁, 세포이항쟁, 대항쟁, 1857년 반란, 1857년 폭동 등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립니다. 하지만 이는 모두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명칭에 대한 논쟁의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동인도회사와 인도의 저항세력 모두가 잔혹 행위를 많이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1857년 세포이 반란이라는 명칭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당시에 인도의 단일 정부가 없었기에 산발적인 봉기 세력이 정식적인 군대로 규합되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당시의 인도 병사들은 벵골군대, 마드라스군대, 봄베이군대, 시크연대 등 다양한 군대와 파벌에서 차출되어 영국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가했다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이에 반해 1차 인도 독립전쟁이라는 명칭을 옹호하는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영국에 반감을 가진 세포이 병사들이 통일 인도의 힘을 상징했던 옛 무굴제국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했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까지도 이 명칭과 사건에 대한 논쟁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전쟁의 원인은 오랫동안 지속된 영국 동인도회사 (동인도 및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무역을 위해 설립된 회사) 의 정책에 있었습니다. 1600년 12월 31일에 세워진 동인도회사는 동인도와 동남아시아 지역의 물품에 관한 통제권과 독점교역권을 영국 왕실로부터 보장받았으며, 1689년에는 인도의 벵골, 봄베이, 마드라스에 특별 행정구역을 설치했습니다. 1784년에는 동인도회사의 영향력이 너무나 강해져 영국의 정부가 인도법을 제정해야 할 상황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듬해에 재정적 안정을 위해 동인도회사는 남아시아의 영국령 지역을 확장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자 영국 정부는 인도의 왕자들에 대한 입양권리를 확보하면서 12개국 이상의 인도 독립왕국에 대한 대규모 합병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80,000평방마일의 땅과 그곳에 살던 400~500만명의 사람들이 강제로 점유당하게 됩니다. 새로운 영토와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영국은 40,000명의 영국 병사와 200,000명의 남아시아인 병사로 구성된 군대를 주둔시키는데, 이때부터 독립된 주의 개념은 사라졌습니다.


세포이라고 불리는 남아시아 출신 용병들이 영국의 지휘관과 충돌이 일어난 직접적인 계기는 1857년에 도입된 엔필드 라이플이었습니다. 엔필드에서 제임스 P.리가 개발한 이 총은 303구경 탄환을 사용하는 수동 장전식이었는데, 이 총을 장전하려면 돼지기름과 소기름을 사용한 탄약포의 끝 부분을 입으로 뜯어야하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돼지기름을 입에 대는 것이 금기로 되어 있는 이슬람교도와 소기름을 꺼리는 힌두교도 병사들이 반발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 사건은 여러 문화가 공존하는 거대한 인도에 대해 100년 이상 지속된 영국의 압력과 압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긴장상태는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고 1857년 5월 9일을 기해 무력을 통한 대대적인 저항운동으로 확되되었습니다. 메루트에 주둔하던 벵골군 소속 세포이 기병들이 지휘관에게 반기를 들면서 시작된 이 항쟁은 1858년 6월까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항쟁이 진압되고 영국은 다시 인도를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직 인도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해본 적도 없고, 관련 다큐멘터리도 거의 봤던 기억이 없어서 제가 기억하는 인도는 소가 있고 모래가 많고 더운 나라로써의 인상만 남아 있는 국가입니다. 미국의 IT관련 업계에 인도인들이 많이 있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던 기었이 있습니다만, 영국과의 좋지않은 과거관계가 후세의 인도인들에게 영어권 문화에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긍정적인 영향을 준것은 아닌가 하는 어설픈 추측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