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근대의 역사: 프랑스 대혁명(1)

오늘은 근대역사의 대표적인 사건인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한 번에 다 담기에는 분량이 많을 수 있어 2회에 걸쳐 글을 올려보겠습니다. 당시 유럽의 군주들은 계몽주의 사상을 이해하며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프랑스의 왕들은 여전히 세상의 변화와 거리를 두며 국민 위에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귀족들은 화려함을 추구하며 장식적인 궁정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 결과 민중의 봉기가 시작되었고, 국고를 모두 탕진한 왕은 대표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대표회의에서 왕은 민중 봉기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 보다는 다시 국고를 채울 수 있는지에만 관심을 두었는데 이로 인해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국민들을 생각하지 않는 정치에 분노한 군중은 무기를 얻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으로 몰려갔습니다. 국민들은 프랑스인 누구나 동일한 기회나 권리를 얻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들은 다시 베르사유 궁전으로 향했습니다. 이렇게 혁명의 시작과 함께 왕과 그의 일족은 감금되었습니다.


유럽의 각국은 18세기 이후로 각각 혁명을 맞이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정치적, 사회적으로 심각한 모순을 가졌던 프랑스에서 먼저 혁명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전 유럽의 미래를 뒤흔든 대사건으로 그에 대한 원인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루이 14세 이래로 전제정치를 하며 삼부회를 한 번도 소집하지 않았던 점, 왕들이 사치를 일삼고 국가의 재정을 탕진한점, 타국과의 전쟁에서 패배를 거듭한점입니다. 많은 식민지를 잃으면서 왕실의 권위와 정부의 위신은 크게 하락했습니다. 귀족과 성직자들이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더욱이 면세의 특권을 가져 풍족한 삶을 살았던 반면 국민들은 과중한 세금부담에 허덕이며 노예와 같은 수준의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등 여러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등장하면서 민중의 평등과 자유, 인권에 대한 관심이 사회적으로 크게 확산되었습니다. 게다가 루이 16세가 정치적 실수를 반복하자 왕과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분노로 폭발했고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1774년 즉위한 루이 16세는 온화한 성격을 가졌으나 결단성이 부족해 실정을 거듭했고 국가의 재정은 파탄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튀르고, 네케르 등을 등용해 재정을 맡기려 했으나 귀족과 성직자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루이 16세 자신은 자신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에 좌지우지되어 개혁의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1789년 왕은 루이 14세 이후 소집되지 않았던 삼부회를 소집했으나, 성직자, 귀족들과 평민의 의원들이 충돌했고 국민들은 국민의회를 조직해서 신헌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민중들의 불만과 분노에 불안을 느낀 왕은 무력으로 국민의회를 진압하려 했습니다. 이에 민중들은 파리에서 봉기했고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했습니다. 각 지방에서도 농민들의 저항이 일어났고 이 사건은 마침내 프랑스 대혁명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기록하고, 다음번에 대혁명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혁명의 결과가 무엇으로 연결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