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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근세의 역사: 떠오르는 프랑스2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근세시대 부강해지는 프랑스의 성장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루이 14세의 내정을 살펴보자면 루이 14세는 마자랭을 재상으로 중용한 후 프랑스 국내의 통일 그리고 중앙집권에 힘썼습니다. 마자랭의 사망이후 콜베르를 재무대신으로 등용하여 복잡하게 꼬여 있는 재정을 바로잡으려 애썼습니다. 끊임없을 영토확장 전쟁에 대비하여 군대를 정비하여 뛰어난 육군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군대를 통해 영국과 네덜란드, 에스파냐 등의 주변국과의 전쟁에서 많은 이득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재위 말년에는 결국 초기의 영토 규모로 다시 축소되었습니다. 프랑스 국내의 산업을 보호하고 동시에 장려하며, 식민지의 경영을 위해 해외에서는 끝없이 영국과 경쟁했습니다. 루이 14세 스스로 무대에 설만큼 발레를 즐겨, 문학과 예술을 크게 장려했습니다. 덕분에 그의 재위기간에 뛰어난 작가와 예술가들이 많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 베르사유 궁전의 건설 때문에 국민들이 많은 불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1685년 낭트 칙령을 폐지하여 신교도 기술자들이 외국으로 도망가게 되면서 산업을 쇠퇴 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번에는 루이 14세의 정복전쟁과 외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프랑스의 부강함을 발판으로 연이은 정복전쟁을 통해 영토확장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실패하고 맙니다. 루이 14세는 30년 전쟁에 개입한 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독일로부터 새 영토를 얻습니다. 또 왕비가 에스파냐 왕의 딸이라는 것을 명분으로 에스파냐령인 네덜란드의 왕위 상속권을 주장하며 전쟁을 벌였으나 네덜란드의 저항 그리고 영국의 지원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왕은 네덜란드에 대한 적개심으로 영국, 덴마크 등과 동맹하여 네덜란드를 공격했으나 독일과 에스파냐의 방해로 인해 또 실패하였습니다. 독일의 팔츠 지방을 공격하였으나 영국의 반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프랑스의 역사는 세계사를 접하기 전까지만 해도 초등학교에 다닐 때 봤었던 '베르사유의 궁전' 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즐겨 보던 애니가 아니다 보니 프랑스 혁명과 루이 16세의 죽음 정도 밖에 알지 못했습니다. 루이 14세와 프랑스 왕실의 이런 사치생활이 훗날 루이 16세의 처형과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자연적 섭리이라 생각합니다. 오히려 프랑스혁명이 너무 늦은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루이 14세의 손자가 루이 15세이고, 15세의 손자가 16세이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