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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중세의 역사: 기사도와 기사육성

기사도

기사도는 초기에 '승마술'을 의미했습니다. 기사들은 스스로를 농민 성직자와 구별했고, 멋진 무기와 강인한 말, 그리고 잘 갖춰진 갑옷은 신분의 상징이었습니다. 12세기 들어 기사도는 기사 전체의 생활방식을 담는 단어로 그 의미가 변했습니다. 


- 여자와 약자를 보호한다.

- 부정과 악에 맞서 정의를 수호한다.

- 조국을 사랑한다.

- 목숨바쳐 교회를 수호한다.


하지만 실제 기사들과 귀족들은 상황에 따라 기사도의 규범을 어기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특히 귀족간의 반목과 영토분쟁이 있을 시 자신의 이익이 기사도 보다 우선시 되곤 했습니다. 부족장이 쌓아둔 부가 장자에게만 물려주지 않고 아들들에게 분할상속되는 게르만족의 관습이 형제간의 싸움을 넘어 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카롤루스 대제의 손자들의 분쟁입니다. 당시 기사단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었으며, 영지 내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기사육성

귀족의 7, 8세 소년들은 영주에게 시동으로 보내졌으며, 무기와 말을 다루는 기본 훈련을 받았습니다. 영주 가족의 여성들로부터 기본적인 사교술도 배웠습니다. 14살 정도에 수습기사인 종사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젊은이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사에게 배정되었습니다. 종사는 기사의 동료이면서 하인역할을 맏았습니다.  기사의 갑옷과 무기를 닦고, 소유물을 챙기고, 경호하기도 했습니다. 마상시합과 전투에서도 기사를 도왔습니다. 부상자를 돌보고, 부상당한 기사를 구하고, 기사와 함께 출정하여 옆에서 싸우는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전투에서 기사는 종사와 싸우기를 피했고, 가급적이면 자신과 비슷한 신분이거나 높은 신분의 기사와 싸우려했습니다. 종사와 싸워 이겼다 해도 그에 따른 수고를 크게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반면 종사는 명예를 얻기 위해 기사를 죽이거나 생포하려고 했습니다. 종사는 전투 외에 글읽기와 음악, 춤, 노래를 배웠습니다. 


종사는 21세가 되면 기사가 될 수 있었는데, 영주나 고위 기사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습니다. 초기에는 기사가 되는 의식이 간단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의식은 복잡해졌으며 교회가 의식을 주관했습니다. 기사 신분은 지위에 해당하는 책임감이 필요했고, 영토나 수익이 있는 사람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밚은 부나 권력을 쥔 영주와 주교들은 큰 규모의 기사들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고용관계로 발전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전투에서 크게 활약한 종사는 영주의 인정을 받고, 전장에서 기사 작위를 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