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근세의 역사: 영국 혁명1

쯔구 2017. 2. 25. 06:57

17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청교도혁명 그리고 명예혁명을 영국혁명이라 부릅니다. 영국에서 일어난 혁명의 중요 요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국은 비교적 빨리 장원제도가 무너졌고, 부유한 지주층 젠트리와 자영 농민의 성장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의회에서 활동하며 많은 하원의원 의석에 자리잡게 됩니다. 이들의 많은 수가 청교도인이었고, 영국 국왕의 전제정치 그리고 국교회의 압박에 불만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도시에서 공업과 무역으로 성장한 시민층과 함계 청교도혁명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영국 혁명의 전반부를 튜더 왕조, 스튜어트 왕조 그리고 제1 혁명을 통해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죽음 이후 영국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1세가 재위하면서 스튜어트 왕조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민권과 헌법을 생각하지 않고 국회를 해산시킨 후 전제정치를 진행했습니다. (왕권 신수설은 절대주의 시대에서 왕의 절대성을 주장합니다. "왕은 신으로 부터 권력을 받았고, 왕의 정당성에 대한 근거를 신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왕은 국교회의 예배에 사용할 수 있는 표준성경을 영어로 만들도록 명령했습니다. 가톨릭과 청교도를 압박하며 국교회로 개종하기를 강요했고, 이에 민심을 잃게 되었습니다. 아들인 찰스 1세 또한 왕권신수설을 지지했고, 절대적인 권력을 탐했습니다. 불만이 쌓인 민중들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영국의 국교회를 강요한 결과 전쟁이 일어났고, 이는 결국 찰스 1세의 몰락으로 이어졌습니다.


국교회의 강요를 크게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킨 스코틀랜드인에 대항해 찰스 1세는 의회 소집 후 군비 충당을 위한 과세안을 요구 했습니다만, 의회는 이를 반대하고 거절했습니다. 왕은 군사력을 통해 반대파를 축소시키려 했으나 왕당파와 의회파로 분열하여 갈등하던 의회는 내전으로 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의회파에 속했던 명장 올리버 크롬웰이 철기대를 이끌고 각지의 왕당파를 정리한 뒤 네이즈비와 랭포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찰스 1세를 잡게 됩니다. 승리한 의회파는 입헌군주파와 공화파로 다시 분열되었고, 공화파의 크롬웰이 입헌군주파를 정리한 후 찰스 1세를 처형하면서 크롬웰의 공화정치가 시작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