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역사: 영국 정당정치와 개혁
17세기말부터 영국의 양당제는 지속되어 왔습니다. 양당은 서로 경쟁관계였으며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는 주요 현안에 대해 한쪽은 보수적으로 다른 한쪽은 진보적으로 정책을 수립했습니다. 물론 소수정당들도 존재했으나 대체로 2개의 정당이 주축이되며 서로 견제하는 것이 영국정치를 잘 나타내는 특징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영국의 정치제도 및 양당제의 특성은 정치영향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내각의 역할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오랜 역사를 거쳐오면서 영국 정치의 궁극적인 목표는 내각의 장악이었습니다. 18세기 초에는 휘그당과 토리당, 그 후 자유당과 보수당, 현대에 들어서는 노동당과 보수당의 힘싸움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영국의 정당정치는 17세기 찰스2세 때부터 시작했습니다. 토리당과 휘그당으로 나뉘어져 국회 내의 다수 의석을 가진 당의 대표자가 책임내각을 조직했고, 각 대신은 정무상의 책임을 가지고 국왕을 보필하고, 입헌 정치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19세기부터 정당간의 이해관계 속에서 폐단이 생겼고, 더욱이 산업혁명과 공업도시의 성장, 프랑스혁명이후 급격히 성장한 자유주의의 영향 등으로 내정 개혁을 필연적으로 진행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기계의 발달로 인해 산업혁명과 상공업이 큰 붐을 일으켰고, 대도시에 부와 인구가 집중하게 되었으나, 반대로 시골과 지방은 점차 황폐해졌습니다. 하지만 국회의 선거구는 14-15세기에 구획된 그대로를 유지했으므로 대도시에는 의원 선출권이 없고 오히려 시골과 지방에 의원 선출권이 많은 구조였습니다. 변화가 필요하다 느낀 시민들은 지방 선거구를 부패선거구라고 비난했고 시대에 맞는 선거구 개정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찰스 그레이의 휘그당 내각이 수립되면서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결과, 신흥 도시에는 선거구를 신설하게 되었고 부패 선거구의 많은 부분은 없앨 수 있었습니다. 자연히 지방에 있던 대지주 세력이 약화되었고 대도시 상공업자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잉글랜드는 1801년 아일랜드를 병합했고, 대브리튼-아일랜드 연합왕국 이라고 칭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1673년 심사율이 제정된 이후 구교도가 관직이나 공직에 오르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아왔는데, 구교도가 대다수였던 아일랜드에서는 이점이 불만이었습니다. 이에 웰링턴 내각은 1829년 구교도 해방 법안을 통과시켰고, 신구 양교도에 동등한 권리를 줄 수 있었습니다. 1833년 노예제를 철폐하는 노예 폐지법이 통과되었습니다. 1787년 윌리엄 월버포스와 토머스 클락슨은 노예무역 폐지협회를 창설한 후 노예제도의 폐지를 꾸준히 주장했으나 현실적인 문제가 걸림돌이 되어 실현되지 못하다가 그레이 내각이 들어선 후 마침내 그 결실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식민지의 8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노예라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1815년 곡물법이 발포되었는데 외국에서 수입되는 곡물에 많은 세금을 거두어 자국의 농업을 보호했습니다. 그결과 곡물의 값은 높게 유지되었지만 그 이익의 많은 부분을 귀족과 대주주들만 가져간다는 문제가 확인되자 코브덴과 브라이트가 있는 맨체스터학파가 곡물법 반대동맹을 조직해 곡물법 폐지에 힘썼고, 때마침 아일랜드 대기근이 발생하면서 보수당 내각은 1846년 마침대 이를 폐기했습니다. 그 후 영국의 농업은 축소되고 상업이 크게 성장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