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근대의 역사: 나폴레옹의 등장

쯔구 2017. 2. 1. 05:29

나폴레옹 1세는 프랑스의 군인이고, 제1통령 황제입니다. 혁명 이후 제1 제정을 건설하고, 국정을 정비했으며 법전을 편찬하는 등 개혁정치를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유럽의 여러 국가를 침략하며 세력을 넓혔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원정 실패와 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유배생활을 하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프랑스의 총재정부는 적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를 공격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정벌군을 일으켰습니다. 독일로 진격한 제1군과 제2군은 패배하였으나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제3군은 전투마다 큰 승리를 거뒀고,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를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1797년 오스트리아는 이에 굴복했고,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통해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은 무너졌습니다. 이 조약에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이오니아 제도를 얻고, 라인강 좌안을 할양받았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18세기 서구의 두 강대국으로서 세계의 곳곳에서 충돌하였습니다. 영국은 조금씩 프랑스보다 우위를 점하곤 했습니다. 이에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영국의 해상권을 견제하고 그들의 식민지인 인도와의 연대도 끊기 위해 오스만 투르크령인 이집트 원정을 명령했습니다. 나폴레옹은 1798년 이집트에 상륙한 후 큰 승리를 거뒀으나 해군이 아부키르만에서 영국에게 패배했기 때문에 이집트에서 고립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됩니다.



1799년 영국의 총리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오스만투르크, 포르투갈 등을 회유하여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을 맺었고, 프랑스를 압박했습니다. 프랑스의 총재정부는 대프랑스 세력을 막아낼 능력이 부족했으므로 나폴레옹은 영국의 함대를 피해서 급거 귀국했고, 쿠데타를 통해 총재정부를 무너뜨린 후, 통령정부를 수립했습니다. 신헌법을 제정한 후 3명의 통령을 두어 나폴레옹은 제1통령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3원을 두어 입법을 맡겼으나 정치적인 실권은 나폴레옹이 장악했고 공화정치는 겉치레 뿐이었습니다. 영국, 오스트리아 등은 계속해서 프랑스와 적대관계를 유지했고 나폴레옹은 이탈리아로 진격했습니다. 나폴레옹은 1800년 마렝고 전투를 통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고, 모로 장군은 호헨린덴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뒀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이에 다시 굴복했고 류네빌에서 강화하여 라인강 좌안을 프랑스에 할양했습니다. 러시아는 이미 대프랑스 동맹에서 탈퇴한 상황이었고, 영국또한 동맹의 주창자인 피트가 물러났습니다. 영국은 트리니다드 섬과 실론 섬을 제외한 침략지 전부를 프랑스에 돌려주었습니다. 이에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은 또다시 와해되었습니다. 여러 차례의 정복전쟁을 승리로 이끈 나폴레옹의 명성은 더욱 널리 알려졌고 1802년 종신 통령에 선출되었고, 1804년 황제로 추대되어 나폴레옹 1세라 칭하였습니다. 나폴레옹 1세는 오랜 전쟁의 결과로 혼탁해진 재정을 관리했고, 교육 장려를 위해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중앙은행을 창립한 후 자금의 회전을 도모했습니다. 나폴레옹 법전을 만들어 사법제도를 개혁했고, 공훈이 많은 사람에게 작위를 주어 신귀족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선거를 통해 지방관리를 뽑았습니다.


나폴레옹 1세가 1805년 즉위하자 영국의 총리 피트는 러시아, 스웨덴, 오스트리아를 다시 끌어들여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맺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공격하기 위해 애썼으나 영국의 넬슨 함대에게 대패했습니다. 해상에서의 대패를 회복하고자 나폴레옹 1세가 친히 동쪽으로 진격해서 러시아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오스트리아와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맺은 후 베네치아를 획득했습니다. 나폴레옹 1세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세력 확대를 서남부 독일의 16주를 규합하고, 라인동맹을 맺게 했습니다. 독일의 통일은 깨어졌고 프란츠 2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라 칭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신성로마제국은 오토 대제 이후로 845년 만에 역사 속으로 묻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