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근대의 역사: 프랑스 대혁명(2)

쯔구 2017. 1. 30. 06:41

지난번 왕실과 성직자, 귀족들의 정치적 모순 때문에 시민들이 분노하게 되었고 그렇게 프랑스 대혁명은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혁명의 결과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후 흉흉한 정세에 크게 두려움을 느낀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1789년 8월에 인권선언을 결의하면서 만인은 자유롭고 평등하며,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고유의 특권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파리의 군중들은 베르사유 궁전을 습격했고 왕 루이 16세와 그의 일족들을  튀를리 궁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1790년 6월 국회의회는 신헌법을 제정했습니다. 루이 16세는 왕비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도피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다시 잡혔습니다.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어 갈등을 벌이던 국민의회는 결국 해산했고, 새로운 헌법에 의한 입법의회를 열어서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였습니다. 입법의회는 공화주의 의자인 지롱드당과 자코뱅 당이 큰 영향력을 가졌고, 왕당파는 무기력했습니다. 두 당 중에 자코뱅 당이 더 우세했는데 그들은 왕정을 폐했고, 중앙집권적 공화제를 실시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 가까운 국가들은 어떻게 대응했을지 살펴보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등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의 열기가 자기들의 국가로 넘어오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며 서로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국경에 군사를 집결하여 루이 16세의 구출과 혁명의 진압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에 프랑스의 국민들은 더욱 분노했고 왕궁을 다시 습격하게 됩니다. 왕은 의회로 피했으나 의회가 오히려 왕을 잡아 탕플감옥에 가둔 후 왕권을 박탈했습니다. 입법의회는 해산하고 국민공회를 열어 왕제를 폐했고 공화제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루이 16세는 처형되었습니다. 1차 대프랑스 동맹은 프랑스 혁명에 경각심을 느낀 유럽의 각 국가들이 프랑스의 혁명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동맹입니다. 루이 16세의 사형소식을 듣게된 영국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에스파냐, 프로이센 등의 국가들은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사방에서 둘러쌓습니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 프랑스의 정치상황을 알아보자면, 자코뱅 당이 지롱드 당을 무력을 통해 축출하고 의회의 전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과하다 싶을 정도의 폭력정치를 단행했습니다. 이를 공포정치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혁명정부는 공안위원회를 설치했고, 마라, 로베스피에르, 당톤 등이 위원이 되어 대부분의 정치를 독점했습니다. 그들은 강제징병법을 통해 새로운 군대를 편성해 왕당파의 내란을 평정하고 외국의 세력에도 대처했습니다. 혁명재판소를 만들어 혁명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단두대로 보내서 처형했습니다. 공안위원장 마라가 지롱드당을 지지하는 여성에게 피살당하자, 로베스피에르는 정적 당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몹시 복잡하게 꼬이게 되었고, 결국 로베스피에르 또한 반대파에게 기소되어 사형당했습니다. 그리고 공안위원회 및 혁명재판소는 철폐되었고 공포정치는 약 1년 정도만에 끝났습니다. 국민공회는 다시 세력을 회복했고, 신헌법을 제정한 후 해산하였습니다. 5명의 총재가 선출되어 행정권을 맡기게 되었고, 원로의회 그리고 정원 500명의 의회를 두고 입법권이 맡겨졌습니다. 새로운 정치에 저항하는 왕당파와 자코뱅파의 세력들이 파리에서 난을 일으켰으나 당시 청년 사관이었던 나폴레옹이 이를 진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