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중세의 역사: 장원제도

쯔구 2017. 1. 23. 06:09

중세시대 영주가 하사했던 일반적인 봉토는 장원이라 불리는 소작지를 의미했습니다. 장원은 대체적으로 오두막, 경작지, 목초지, 주변이 풀이나 숲으로 둘러져 있는 규모가 있는 성이나 집이었습니다. 보통 장원은 그곳에서 난 식량을 그곳에서 소비하는 자급자족의 형태였고, 잉여 작물이 생기는 경우 다른 장원에서 생산된 물품과 교환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잉여작물이 늘어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시장도 커졌습니다. 그리고 점차 다양한 물품을 생산하는 것 보다 인기 있는 몇 가지 물품만 전문적으로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포도주, 치즈, 돼지, 곡식 채소 등이 장원의 특징에 따라 전문적으로 생산되었습니다. 


장원에 있는 사람들은 귀족도 직업인도 아닌 대부분 농민이었습니다. 장원의 지주는 가족과 하인, 가신들과 함께 장원이 있는 성이나 집에서 살았습니다. 직업군인들과 기사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장원을 보호하면서 군인의 임무도 함께 수행했습니다. 규모가 큰 장원일 수록 이러한 가신들의 수가 많았습니다. 농장의 일꾼은 농노가 대부분이었으며 일주일의 절반을 영주의 땅에서 일하곤 했습니다. 농노 가족은 장원의 경장지 중 일부를 소유하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들 농노는 자유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노예도 아니었습니다. 농노는 노예와 다르게 몇 가지 권리를 가졌습니다. 농노라는 신분은 계속해서 세습되었으며 농노가 가진 의무를 잘 이행하는 경우에는 농노의 땅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중세시대와 장원제도가 진행하고 발전하면서 농업기술도 점차 진화했고 농노의 생활도 자연스럽게 변화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식량생산이 증가했고, 잉여 농산물을 판매한 돈을 통해 자유인 신분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중세말기에는 서유럽에서 농노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장원, 장원제도 라는 말을 들으면 웬지 우리나라 과거 조선시대의 과거시험과 장원급제가 생각납니다. 조선 말기에도 양반이라는 신분을 돈을 주고 살수 있었는데 중세시대 유럽 말기의 모습과 비슷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농경은 인류가 생존하고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지만 그것을 기반으로 상업과 서비스로 발빠르게 발전시킨 국가들이 세계를 리드하고 있다는 점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겠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무기의 발전과 전쟁의 씨앗이 싹트기도 하지만 그 이후 진보된 기술과 인간의 호기심은 조만간 인류를 우주시대로 다가가게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호기심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인류가 찾아낼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어쨌든 세상은 참 흥미롭고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