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중세의 역사: 봉건제도의 몰락

쯔구 2017. 1. 21. 06:42

봉건제도의 몰락은 크게 정치적인 변화 그리고 무서운 질병이라는 2가지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이번에는 정치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중세시대 말기가 되면서 서유럽은 여러 규모의 봉건 영지로 나누어졌습니다. 국왕은 봉건계급 구조의 최상위에 위치했지만 과거와 같은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지 못했고, 국가들은 정치적 목적이 아닌 문화적 목적에 발맞춰 움직였습니다. 중세시대가 끝날 무렵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에서는 강력한 중앙집중 권력이 등장했고, 그 지역에서 영향력을 가졌던 봉건영주들은 그간의 정치권력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1066년 영국의 왕이 된 윌리엄은 유럽 최초로 강력한 군주정치를 시작했습니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하고 남은 잔당군들과 5년에 걸친 긴 싸움이 끝나고, 윌리엄은 권력을 하나로 통합하는 활동을 시작합니다. 윌리엄은 영국 땅의 6분의 1을 국왕의 영토로 정했습니다. 그 나머지의 반은 직속 봉신으로 있었던 노르만 귀족들에게 지급되었으며, 나머지를 교회와 앵글로색슨족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윌리엄은 모든 성을 소유했고, 영주간의 전투를 금했으며, 왕실의 화폐만을 유일한 공식화폐로 인정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영국의 국왕 헨리 2세는 12세기에 대법관청과 재무부를 설립했습니다. 법률과 왕실의 수입, 지출에 대한 기록을 대법관청이 관리했고, 재무부는 국고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 두 곳의 관직은 세습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국가의 상황에 맞게 관료를 늘리거나 줄이면서 유연하게 인력을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새롭게 들어온 관료들은 봉토를 받는 대신 월급을 받았으므로 국왕에 대한 의존도는 더 높아졌습니다.


1215년 영국의 존왕(John)은 국왕이 토지법률을 준수하고 귀족들이 대회의를 통해 국왕의 결정에 대한 의견을 내세울 수 있게 한 봉건문서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해야 했습니다. 마그나 카르타의 내용은 후대의 조약 해석에도 중요한 기반이 되었는데, 1264년 마그나 카르타의 내용을 따르지 않은 영국의 왕에 대항하여 귀족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의회를 통해 일정 기간 국가를 운영하였습니다. 의회는 고위 성직자와 귀족, 대도시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의회는 1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유지되었지만 의회를 억압하거나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 이후부터 오직 의회만이 법을 폐지할 수 있게 되었고,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서는 의회의 승인이 꼭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왕이 의회에 돈을 빌리는 경우 왕은 그에 대한 대가로 더 많은 권력을 양보하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왕의 국정운영 능력이나 귀족들의 반란에 영향이 없진 않았으나 본분에 충실했으며, 국가의 운영에 긍정적인 영향을 행사했고 그 결과 의회와 공무원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국왕과 의회, 공무원들이 위에서 귀족들의 권력을 압박했고, 귀족들은 봉건계층의 아래계급으로 부터도 압박을 받았습니다. 도시 인구가 증가하게 되었고, 이민족의 침입은 중단되었으며, 14세기 유럽을 공포로 휘감은 전염병을 비롯한 다양한 요인이 뒤섞여 봉건제도하에 있던 농민들은 영주와의 계약에서 점차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다음번 글에서는 앞서 잠깐 언급한 전염병 페스트(흑사병)를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질병과 국가의 정치는 별다른 관련성이 있을 것 같지 않은데 과연 어떤 일이 있었을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