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역사: 기사단과 문장, 문장관
기사단
기독교의 성지탈환을 위해 일어난 십자군 전쟁 중에서 기사들로 구성된 군대 기사단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은 십자군 중에 가장 난폭했으며, 아랍군이 가장 증오하는 적이었습니다. 결국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난 후에도 기사단은 유지되었습니다.
기사단 중 첫번째 기사단으로 신전 수도 기사단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지를 수호하기 위해 1108년에 설립되었으며 빨간색 십자가에 흰 바탕이 있는 옷을 입었습니다. 그들은 가장 용맹스러운 성지의 수호자들 중 하나였으며 성지를 떠난 마지막 십자군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해거 거듭되면서 기부금과 고리대금업을 통해 부를 쌓았고, 국왕으로부터 불신과 질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의 필립 4세는 1307년 이들을 이단의 죄목으로 고발, 체포했고 토지를 몰수했습니다. 유럽의 다른 통치자들도 비슷한 조치를 취했고 신전 수도 기사단은 해체되었습니다.
두번째 기사단으로는 예류살렘의 성존기사단(호스피털기사단)입니다. 성치를 찾는 병들고 가난한 순례자들을 돌보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설립 후 곧 군대 기사단으로 전환된 이들은 흰색 십자가가 새겨진 빨간옷을 입고 성 베네딕트의 서약도 따랐습니다. 그들은 엄격한 규율을 통해 기사단이 부유해지고 나태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세번째 대규모 군대 기사단으로는 성지로 여행하는 게르만 순례자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1190년에 설립된 튜턴족 기사단이 있습니다. 이들은 십자군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 발트제국과 러시아의 이교도를 개종시키는 형태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문장과 문장관
봉건시대에 기사들을 전장 속에서 식별하기 위해 문장이라 하는 기장체계가 발달했습니다. 귀족들을 표시하는 특수 기장이 방패와 옷, 깃발, 인장에 새겨졌습니다. 독립적인 조직인 문장관 협회에서 기장을 디자인했는데, 이들은 각 기장을 전부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문장관은 각 기장을 특별한 책자에 기록하고 보관하였습니다.
기사들의 문장은 다음 세대까지 이어졌고, 결혼을 통해 문장이 변경되기도 했습니다. 국가마다 왕실에서 사용하기 위해 일부 디자인은 사용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중세시대 말 즈음 도시나 길드 또한 문장을 받을 수 있었고, 특출난 시민들도 문장을 받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전장 속에서 문장을 통해 아군과 적군이 구분되고 상대할 적군을 가려냈습니다. 심지어 문장관은 기장에 따라 싸울만한 상대기사의 목록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문장관은 중립자로서 양 군대 간의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도시와 성의 공격군과 수비군 간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