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중세의 역사: 봉건제도와 봉건계약

쯔구 2017. 1. 14. 06:00

오늘은 기사와 영주의 사이를 좀 더 확고히 엮어주는 역할이었던 봉건제도와 봉건계약에 대한 글입니다. 봉건시대는 이 봉건제도가 시행된 시대를 의미합니다. 


중세의 시대에 가장 가장 대표적인 정치 경제구조는 봉건제도였습니다. 봉건제도는 로마제국의 말망 후 무너진 중앙정부의 권위를 발판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봉건제도는 영주와 봉신간의 계약을 의미합니다. 영주는 봉신과 봉신의 부하를 보호하고 봉신에게 생계수단을 약속했습니다. 봉신은 영주에게 충성하고 영주를 대신해 의무를 수행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봉신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1년에 40일 정도로 제한되어 있는 군역으로 병사를 제공하고 영주에게 공물을 바쳤습니다. 영주는 대규모 토지(봉토)를 봉신에게 제공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세금 징수원, 관세 조사관, 화폐 생산자 등의 직위를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봉신을 마찰 없이 잘 통제하는 영주는 엄청난 공물과 군대를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봉신이 의무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 영주는 봉토를 회수할 수 있었지만 봉신은 영주를 떠나기 어려웠습니다. 중세시대 초기에는 봉토를 세습할 수 없었으므로 봉건계약은 영주에게 유리했습니다. 시대가 흐르면서 봉신들은 자신의 자식에게 봉토를 상속할 수 있는 명분과 수단을 찾아냈고, 그 결과 영주가 나누어줄 수 있는 봉토는 갈수록 줄어들었습니다.


봉건계약은 귀족과 기사들 사이에서만 서약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귀족들은 영주이거나 봉신이었고, 국왕에서 지위가 낮은 기사의 사이에 위치했습니다. 때로는 봉신이 영주보다 더 많은 군대와 부를 축적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영국 전역과 프랑스 지역을 지배했던 노르망디 공작들은 자신의 영주였던 프랑스의 왕보다 훨씬 더 영향력이 컸습니다. 봉신은 여러 영주를 섬길 수 있었는데, 영주들이 군역을 동시에 요청하는 경우도 있어 그때마다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대체로 지위가 높은 영주가 우선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봉건제도의 규율을 무시할 만큼 영향력이 커진 귀족들의 경우 남을 공격하여 원하는 것을 얻기도 했는데, 이러한 탐욕의 전쟁이 중세시대 말기를 특징짓게 됩니다.


저 개인적으로 봉건제도는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사회사상이라고 예전부터 생각했습니다만, 영주와 봉신간에 계약이라고 단순히 생각하니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졌습니다. 물론 좀 더 파고들면 깊은 이야기가 있겠지만 표면적으로는 단순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 영주를 모시던 봉신이 동시에 여러 영주의 군역요청을 받았을 때 자신이 받을 보수와 명예, 명분 등의 여러 조건을 두고 저울질 하며 결정을 내렸을 장면을 상상해보면 인간이 사는 세상은 정말 비슷하구나 라고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