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중세의 역사: 마상시합

쯔구 2017. 1. 13. 06:30

기사들의 또다른 전투 무대인 마상시합은 10세기에 시작되었습니다. 유럽의 왕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상시합은 번창했고, 기사의 명예와 삶에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갔습니다. 초기에는 기사 간의 단순한 경기로 시작되었지만, 세기를 거듭하면서 더 섬세하고 복잡한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기사들 간의 심심풀 정도 수준으로 시작된 마상시합은 세기를 거듭하면서 정교해졌고, 참가자들의 훌륭한 실력과 쇼맨십은 없어서는 안될 소재가 되었습니다. 현대의 스포츠경기와 비슷한 형태를 띄며 후원자와 참가자를 모으며, 마상시합은 그 사회의 중요한 행사가 되었습니다. 경기장이 건설되면서 참가자를 위한 부속건물과 구경꾼을 위한 관람석이 준비되었습니다. 현재의 프로스포츠구단과 같은 선수를 후원하는 단체가 있진 않았지만, 팀을 이루어 참가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여러 종류의 무기를 사용할 수 있었고, 여러 동료 기사들과 함께 가상 전투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두 명의 기사가 말을 타고 창을 통해 실력을 겨루는 마상 창 시합이 가장 인기 있었습니다. 훌륭한 성적을 올린 참가자들은 명예와 포상은 물론, 관람석에 메워진 여성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상시합은 우호적인 경쟁과 사회적 행사의 의미를 담고 있었지만, 상대방 또는 상대단체에 적개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참가자들도 있어 참가자가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13세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마상시합에서 목숨을 잃자 교황과 통치자들이 우려를 넘어 불안함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1240년에 있었던 콜로뉴의 마상시합에서 60여명의 기사가 죽게 되었습니다. 통치자들은 이러한 기사들이 마상시합 대신에 성지에서 십자군으로 활동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무기를 일부러 무르게 다듬고, 우연한 사고에 의한 큰 부상을 줄이기 위해 시합규칙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마상시합의 인기에 맞물려 참가자들의 중상과 치명상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지위가 낮은 하급기사가 시합에서 이기는 경우 부와 명성, 그리고 부유한 아내를 얻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패배자는 포로로 잡혔고, 말과 무기, 갑옷을 승자에게 지불해야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현대사회의 스포츠경기에서 시합결과와 내용을 기록하듯 당시에는 문장관이라는 직책도 있었습니다.


과거 유럽의 역사를 담은 영화나 드라마를 봤던 기억이 거의 없는 저로서는 마상시합의 규모와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시각적으로는 좀 와닿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히려 더 고전인 로마 콜로세움의 검투사경기는 최근 영화와 드라마의 인기소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이라는 종은 얼마든지 악마다 싶을 정도로 잔인할 수도, 식물에 가깝다 할 정도로 평화로울 수도 있기에 마상시합 정도라면 그 시대의 훌륭한 인기스포츠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