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 세키가하라 전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의 통치자가 되려는 야심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힘의 균형을 놓고 벌인 일본 통치세력 다툼의 절정인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운명을 결정짓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200년 이상 지속되었던 군사 독재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지방 영주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2년에 걸쳐 일본 전국을 통일했고 일본 최고의 권력을 손에 쥐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의 실패로 그의 인생에 오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악화되는 건강으로 권력이 흔들리는 것을 걱정한 히데요시는 자신의 가문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준비해 나갔습니다. 1598년 그는 사망하기 전에 다섯명의 지방 영주들을 섭정으로 지명해 자신의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그를 보필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판단은 어긋났습니다. 섭정들 모두 자신 나름의 속셈이 있었는데, 다섯 영주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히데요시의 사망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빠르게 권력을 흡수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며 동맹을 시작합니다. 뒤이어 여러 지역과 성을 점령했는데, 그 중에서는 과거 히데요시 권력의 상징이었던 후시마 성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남은 네명의 섭정들은 이에야스의 무례한 행동에 우려의 시선을 보냈고, 일본은 히데요시가 사망한 지 수개월 만에 지방 영주들이 두 편으로 갈리면서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일본은 이에야스쪽에 가담한 동군과 히데요시의 관료였던 이시다 미츠나리쪽에 가담한 서군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미츠나리가 행동에 나서게된 동기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습니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전직 관료로서 무력보다 의식절차에 더 익숙하던 그가 나름대로는 히데요시 사망 후에 권력의 일부분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전투에 나섰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츠나리의 수하 장군들 중에도 그의 지도력을 신뢰하는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불신이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에는 이에야스의 지도력과 야심에 감탄한 많은 장수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미츠나리를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일본의 중부 지역에서 2년 동안 지속된 전투에 지친 양쪽 진영은 최후의 일전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1600년 10월, 세키가하라 전투가 마츠오 산맥, 사사오 산맥, 난구 산맥, 일본 중북부 지역의 세키가하라 마을 외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대전투에서 양 진영은 어느 쪽이 강한지, 어느 쪽이 밀리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로 전투를 지속했습니다.
비와 안개가 가득한 하루가 저물 무렵에 이에야스의 군대는 60,000명 이상의 적을 제거했고 미츠나리의 군대는 퇴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전국을 손에 넣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과거 자신이 히데요시에게 받았던 것처럼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 장수들에게 포상을 주었습니다. 1603년, 이에야스는 천왕으로부터 쇼군으로 임명되어 공식적으로 도쿠가와 가문의 시대인 에도 시대를 열었으며, 에도 시대는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시작될때 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의 글입니다. 실시간 전략시뮬레이션 게임들을 하다보면 정말 "난전이다!", "정신없다!" 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곤 하는데 세키가하라 전투가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일본에서 천하를 판가름하는 전투로 다큐멘터리나 방송 프로그램의 소재로도 자주 소개된답니다.